石海均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구출된 前 삼호주얼리호의 선장,
現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리더십센터1953년 4월 1일(음력 2월 18일) 생이며,
2011년무종교였으나
, 2011년 여름에 천주교에 귀의하여, 세례명
2. 가족[편집]
석씨 집성촌인 경남 밀양시창원), 석재성(48, 회사원, 울산
3. 경력[편집]
가난 때문에 일반계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산광역시에서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이 역시 가정 형편 때문에 여의치 않아
1971년 8월 해군 하사관후보생
하사관 월급을 모아 73년,
부모님에게 양옥을 지어드리고,
흑백텔레비전대한민국 해군
제대한 뒤 1976년 연안 화물선을 타면서 선원
5년간 선원생활을 하여
주경야독을 한 석해균 씨는
1982년 8월 3급 항해사1984년 2급 항해사, 1988년
1995년 6월 선장
본래 삼호주얼리호가 아니라
, 같은 삼호해운 소속인 삼호프리덤호의 선장이었다.
한 달 전에 삼호프리덤호를 타고
귀환한 뒤,
회사 측의 요청으로 휴식시간도
가지지 않고 곧바로 주얼리호를 타고
출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해군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부이사관(군무원 3급)으로 근무 중이다
. 공무원 부이사관이면 준장에 해당하지만
군무부이사관이면 3급으로 중령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새누리당
4.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활약
석해균 선장은 아덴만 여명 작전
2011년 1월 15일 삼호주얼리호가 납치 당하고,
해적들이 소말리아오만
17일에는 해적들의 명령에 의해
영어로 해운사 측과 통신하면서,
중간중간에 해적들이 한국말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서
상선통신망으로 해군 최영함링스
21일 이루어진 구출 과정 중에
해적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중 한발은 해군의 유탄으로 밝혀졌다. 오만
5. 치료비 논란[편집]
2015년 현재 석해균 선장의
수술을 집도했던 아주대학교병원
추호석 아주대법인 이사장은
“대손금액 중 석해균 선장 치료비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부에서 조치를 해줄 수 없다면
추후 다른 국가적인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면서
“의료원 차원에서 문제제기 정도는
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또한 에어 앰뷸런스 임대 후 비용지급이
늦어지자 해당 회사에서 주치의 이국종이국종
또한 당시 석 선장의 후송에 이용하려는
에어 앰뷸런스는 국제 의료지원 기업
인터내셔널SOS사가 운영하는
스위스제로, 전세비용이 약 40만 달러
이후 대출액은
그 누구도 아닌 한국선주협회에서
지불한 것으로 아주대병원 측에서 밝혔고,
이명박 대통령이 “석해균 선장이 완쾌되어야
작전이 끝난 것”이라고 말할 만큼
석 선장의 안위는 중대한 사안이었고,
국민적 관심도 지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정부의 대처는 정치홍보라고 할 만큼
안일하기 짝이 없었는데,
모든 상황을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주치의 1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 에어 엠뷸런스 대출비용의 보증을
외교부가 서긴 했지만 그건 정권과 별개의 이야기고,
한국에 도착한 뒤의 치료비도
아주대병원이 전액을 떠안은 것.
아덴만의 영웅이라고 칭송하며
동전하나 던져주지 않은 것이다.
3월 22일#
6월 16일, 아덴만 여명 작전의 최영함의 함장 조영주 대령#
2011년 7월 1일, 국제해사기구에서 주는
용감한 선원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2011년 11월 4일, 퇴원하였다.#
2017년 12월 26일 문재인 정부에서
치료비를 정부에서 대납하기로 의결하였다.
6. 기타[편집]
2014년 4월 17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배가 침몰한 것과 이준석 선장이 가장 먼저 탈출한 것에
대해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업무에 태만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라며 분노#
2015년 1월 아덴만 작전 4주년을 앞두고 당시
소말리아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대인배
아덴만 여명 작전진해기지사령부
치료 후 건강 자체는 회복하였지만
아직까지 후유증이 남아 있고 때로는
이게 심해져서 긴급 후송된 적도 있단다.
워낙 부상이 심했었기 때문에 후유증 치료도 이국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