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행

백족산.

마금봉 2011. 5. 1. 22:13

                                        *장호원 백족산*

 

장호원의 옛 지명인 음죽현(陰竹縣)은 고려 때는 충청도 충주목의 속현이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조선 중기에 죽산현에 소속된다. 그 후 다시 음죽현으로 복귀했다가 조선 말엽(1895년)에 이천에 편입되었다. 본시 옛 음죽고을의 치소는 자금의 행정구역상 장호원읍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져 있는 선읍리다.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이 마을을 ‘음죽읍내’라 부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음죽현조에는 ‘이 현(縣)은 산천이 부드럽고 바람이 적당하여 그 곳에 태어나는 백성들은 반드시 진실되고 성실한 바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장군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남이(南怡)는 조선조 세조 때 18세의 나이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침으로써 당대에 이름을 떨친 장군이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을 말을 먹여 없애리(頭滿江波飮馬無)/ 남아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後世誰稱大丈夫)’ 이 시는 남이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할 때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족산(百足山)은 장호원읍의 북쪽 어석리와 진암리에 걸쳐 있는 높이 402m의 나지막한 산이다. 산 아래로는 청미천이 흐르며 그 건너편은 충북 음성군 감곡면이 된다. 예전에는 장호원과 감곡이 같은 음죽현으로 한 고을이었으나 지금은 하천을 도계(道界)로 삼는 행정관행 때문에 청미천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경기도, 남쪽은 충청북도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행정구역을 무시하고 청미천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북쪽을 ‘이천장호원’으로, 남쪽을 ‘음성장호원’으로 부르고 있으니 아직도 한 마을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족산의 등산로는 산기슭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사찰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읍내에서 약 2km 정도의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산기슭에 이르니 무량사 일주문이 사람들을 반긴다. 세운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일주문은 단청조차 하지 않았는데 ‘백족산 무량사’라 쓴 한글 현판이 무척 이채로웠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좁은 경내에는 조성한지 오래지 않은 미타전, 천왕문, 범종루, 사면미륵불, 달마대사상,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탑과 부도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경내를 한 바퀴 휘돌아보고는 오른쪽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잡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이 높지 않은 탓에 중턱에 있는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애기바위를 거쳐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불과 40여 분만에 산꼭대기인 청미봉에 오를 수 있었다. 청미봉에서 읍내를 내려다보니 청미천의 물굽이와 함께 이천장호원과 음성장호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에는 헬기장이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500여m 떨어진 아래쪽에 커다란 굴이 뚫려 있는 바위가 있으니 남이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굴바위’다. 이곳에는 다리 백 개가 달린 커다란 지네가 살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족산’이라는 이름도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굴바위에는 남이장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굴바위 아래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절에는 수십 명의 승려들이 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이상하게도 그 절의 승려가 한 사람 씩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남은 승려들이 겁에 질려 하나 둘 절을 떠나고 마침내 주지승만 남게 되었단다. 불심이 무척 깊었던 주지승은 사라진 승려들이 모두 부처님의 인도로 극락으로 갔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머잖아 승천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평소 각별하게 지냈던 산 아래 마을의 박진사를 찾아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주지승의 얘기를 들은 박진사는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필시 요물의 소행으로 생각한 박진사는 두텁게 옻칠한 두루마기를 주지승에게 내주며 언제나 그 옷을 입고 있으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그래서 주지승은 늘 그 옷을 입고 염불을 하며 승천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무렵에 주지승은 굴바위에 사는 지네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다. 그때 굴바위 쪽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박진사가 이를 이상히 여겨 절에 올라보니 굴바위 앞에 어마어마하게 큰 지네가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네의 입에는 자신이 주지승에게 준 옻칠한 두루마기가 물리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백족산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죽은 지네의 몸에서 새파란 기운이 뻗쳐 나와 곧장 청미천 건너에 있는 개미실(지금의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의 한 집안에 닿았다. 박진사가 그 기운을 따라 가보니 그 마을에 사는 남(南) 씨 댁이었다. 그리고 그날 부터 남씨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열 달 뒤에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남이(南怡)다. 남이장군은 뒤에 공신의 대우를 받아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청미봉에서 동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 보니 커다란 무덤 몇 개가 눈에 띄었다. 백족산에는 예로부터 후손 가운데 군주가 나올 금반형(金盤形)의 묏자리가 있다고 전하니 그 높은 곳에 무덤을 썼을 때는 필시 명당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급한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걸어 내려오니 청미천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이 예전에 농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보(洑)가 있던 자리다. 이 보를 가리켜 이곳 사람들은 ‘자점보’ 또는 ‘자재미보’라 부른다. 예로부터 장호원의 땅이 기름지고 쌀의 질이 뛰어난 까닭은 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자점보의 물을 농수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점보에는 조선조 인조 때의 중신인 김자점(金自點)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김자점은 폭군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공신으로 권세를 얻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지관으로부터 백족산에 군주가 나올 금반형 묏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욕심이 과했던 그는 백족산의 금반형 명당을 찾아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묏자리는 청미천을 앞에 두고 백족산을 뒤로 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은 갖췄으나 가물 때는 청미천의 물이 말라 수세가 미약한 것이 큰 흠이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수세를 보강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보를 쌓았다는 것이다. 그 후 김자점은 출세를 거듭하여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李)씨 왕조에서 김(金)씨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모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래서 김자점은 청나라와 내통하여 역모를 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모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김자점은 참형을 당하고 만다. 당시만 하더라도 역모의 죄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당연지사. 무덤에 묻힌 그의 부친도 부관참시의 형을 받게 되었다. 형리들이 백족산에 있는 김자점 부친의 묘를 파헤쳐 관 뚜껑을 열었는데 시신이 거의 용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리들이 시신의 머리를 자르고 몸뚱이를 난도질해 산에 흩어 뿌렸다고 한다. 즉 자점보는 김자점이 왕이 되기 위한 욕심에서 일부러 쌓았다는 것이니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음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단지 명당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자손이 번성하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니 그런 묏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백족산 금반형 묏자리의 전설은 ‘욕심이 과하면 반드시 화를 부른다’는 옛말을 돌이켜보게 한다. 어쨌거나 자점보의 물은 지독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지금까지 농수로 사용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전설은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일 따름이다. 지금은 전설에서처럼 남이장군이 실제로 음성에서 태어났는지도 확인할 수 없고 김자점이 실제로 자점보를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백족산이 그 자리에 있는 한 이곳 주민들에게 전설은 사실처럼 오래오래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각종 지리지(地理誌)에서 기록하고 있듯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반드시 진실되고 성실하다는 평판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임이 틀림없다.

 

 

                어제내린 비로수량이 풍부하여폭포처럼 물이쏟아지고

               촉촉한 단비로 5월에 만물이 한결 싱그러움을 더해간다.

 

 

 

 

 

 

 

 

 

 

                     정상에서바라본 장호원현대 코아루 아파트

         백족산 약수 바위틈에서 용수하며 오가는 산인들을 기다린다.

 

 

                          

              *연산홍이너무 아름다워 한컷 담았습니다.

                  *배꽃이 새색시처럼아름답다. 과수원이 타곳에 비해 일찍이 전해진곳이며

                   특히 황도복숭아가 유명한 곳이다.

                                   2011,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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