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서울 도심에있는 인왕산은 해발338m낮으막한 산으로
등산로 대부분 이암릉길로 되어있다
무학재로오르면선바위.모자바위.범바위.코끼리바위.
해골바위등 특히나 호랑이가살았다는 호랑이굴등을
탐방할수있다
오늘 율면 농협산악회는창의문을 깃점으로
서울 성곽을 타고정상을 밟는 단조로운 산행에
아쉬움이다
정상에서면 청와대를 비롯 서울시내를
한눈으로볼수있고68-93년 까지
입산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있어 비교적 자연 환경 보전 이
잘되어있는산이라한다
역사적으로는
중인과 양반과에계급타파에
혁신을 일으킨 송석원에 혼이깃들여져있는곳
중인은 양반과 천민 사이의 신분으로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당시 중인들의 구성은 역관(통역), 화가, 의관(의사), 사관(역사기록), 승정원 서리, 잡과의 하급 관리,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양반 사대부에는 끼지못하는
대중서민축에 드는 집단을 말함이다. 그래서 많은 중인들 중에는 이 신분을 탈피해 양반의 신분을 획득하려고 궁궐의 세력들에게 줄을 대는자들이 허다했다한다 이는 예나지금이나 권력이나돈앞에 무력해지는 게 인간인가보다 이는 양반을 우선하는 유교의 사대부들이 만든 계급신분의 부작용이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 자신의 성을 바꾸려는 노력들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톡톡한 수혜자는 신진사대부의 양반세력이었다. 이것이 북악 왕궁을 중심으로 일어난 조선 최대의 부패부작용이었다. 이럴즈음에 북악 왕궁 옆 인왕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인 문화의 산실인 '송석원'은 조선 후기의 신선한 충격이요 청량제였다. 당시 부패할대로 부패한 조선 후기에, 정조의 개혁 바람은 부패한 사색당파의 신진사대부들을 겨눈 칼끝이었다. 그러나 정조도 유교를 근간으로 이룬 사색당파의 뿌리 깊은 힘에 개혁의 노력은 좌절된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나타난 천수경(1758~1818)의 '송석원'은 더러운 세상의 권력을 은근히 풍자, 비판하며 자연의 맑은 모습을 전파하는 지식계층의 모임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엄격한 규율(12규율)로 통제했다. 마치 학문과 문학(당시 한시)을 사대부들이 독점한 것 처럼 행세하는데 대한 잘못을 조용히 질타하는듯, 그들 스스로는 맑고 높은 기상을 탁마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우수성으로 말해 주었다. 그래서 당시 문인들 치고 이 송석원에 이름 석자를 두지 못하면 심히 부끄러워했을 정도로 이곳의 시서화의 권위는 대단했다. 후일 대원군도 이 기운을 받으려 자주 나왔고 여기에서 큰 뜻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송석원의 천수경과 그의 벗들은, 대다수의 중인들이 줄을 대어 신분 세탁을 하고 그래서 벼슬로 나아감을 문전성시하는 북악의 사악한 기운 옆에서, 인왕산의 맑은 기운의 노래를 지엇다.